기억, 향, 그림에 대한 이야기

조세영
2022-10-22
조회수 279

어떤 기억은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해도 무의식에 각인된다. 

그 뒤로 기억들이 켜켜이 쌓였어도 문득 맡은 익숙한 향에 그 두터움을 뚫고 선명해지고 만다. 

이것은 기억과 향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풍요의 상징, 가을이다. 

청량한 하늘, 울긋불긋 단풍잎과 코를 찌르는 은행 냄새, 황금색이 왜 왕의 색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금빛 논밭까지. 

다 좋다.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풍요의 계절 가을 바람에서 알싸한 냄새를 맡고 이윽고 혼자서 고군분투했던 지난 날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되뇌이고 싶지 않은 날들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노곤한 하루에 생기를 더하기 위해 일부러 특정 향에 코를 파묻기도 한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내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기가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후각은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감각이라고 한다. 

이런 명확한 상관관계를 알지 못했던 아주 오래전부터 우연찮게 어떤 냄새를 맡고 기억 저편의 잔상을 떠올리곤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림에도 향이 있으면 어떨까? 


사진은 있는 그대로 찍힌다. 사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사진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다르다. 

시대별로 그림의 특성이 다르고, 몇 백 년 전의 시대는 요즘과 사뭇 달라, 그림에 대한 이해도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화가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다. 


물론 미술관에는 친절하게 ‘가이드’가 있다. 

이어폰만 귀에 꽂으면 그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다만 그림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 역시 그림을 보는 묘미인데, 친절한 가이드 설명을 들으면 그러한 상상력 발휘는 할 수 없다. 

만약 그림에서 그림과 꼭 맞는 향이 난다면? 화가가 그림 실력 못지 않게 조향을 잘해서 그림의 의도를 명확하게 향으로 표현했다면?



그렇다면 그림을 잘 모르는 이들도 그림을 봄과 동시에 향을 맡으며 해묵은 기억의 어느 순간을 꺼내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날씨, 온도, 분위기까지 모조리. 

명확한 가이드가 없어도 향기가 불러온 자신의 기억과 그림을 겹쳐보며 자신만의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알지만 역시 그림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건 못내 아쉽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좋아한다.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 날에도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따스함이 뭉근하게 전해졌다. 

스크램블처럼 보들보들할 것 같은 그림에 위안을 얻었다. 

이상향이 있다면 꼭 이런 모양새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만큼 아득한 행복에 젖어 둥둥 떠다니는듯한 느낌이 드는 그림들. 그저 좋았다.


인상주의의 창시자이자 르누아르의 친구 모네는 시간과 계절을 달리하여 같은 풍경을 여러 번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해가 내리쬐는 낮, 해가 지는 와중, 해가 진 저녁 등. 빛이 보여주는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여 그렸던 모네의 붓터치가 십여 년 지속되었을 때 세상도 모네의 그림을 알아봐주었다. 

실제로 같은 배경을 시간과 계절에 따라 그린 작품들을 연이어 보면 그 배경을 그렸을 순간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같은 풍경을 다르게 표현한 그림들을 통해 그 찰나의 순간을 상상할 수 있었달까.


마음이 어둑해질 때에는 어김없이 르누아르의 그림을 찾아본다. 

그리고 모네가 같은 풍경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전했듯이, 같은 공간에 그때 그때 다른 향을 뿌려 떠올리고 싶은 기억으로 공간을 채운다. 

별다를 것 없는 기억이라 해도 괜찮다. 

원래 행복은 사소한 것들에서 오는 거니까. 이것이 힘에 부칠 때 그 맥락을 끊고 행복을 소환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굿즈 ‘향기나는 엽서 모네, 르누아르’의 ‘향기’는 KiOK에서 만들었습니다. 본문 중 ‘향기나는 그림’에 대한 상상력을 펴고 싶다면 이 엽서로 시작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 0